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4세 (문단 편집) === 암살 === 이후 [[위그노 전쟁]]으로 황폐해진 프랑스의 복구에 힘쓴 뒤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맹주 자리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항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1610년 5월 14일 가톨릭 광신도였던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에게 '''암살당했다.''' 이때 앙리 4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논의하려고 재상인 쉴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전날인 5월 13일에 아내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정식으로 왕비 대관식을 치렀으며[* 앙리 4세는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마리 드 메디시스의 정식 대관식을 미뤄왔다. 물론 1600년 12월 17일 리옹에서 결혼식은 올렸다.], 그 다음날에는 대관식과 관련된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파리 시내에는 교통체증이 발생한 상태였다.[* 암살 장소는 파리의 시장이었던 레알 부근의 페로느리 가(Rue de la Ferronnerie)였으며, 페로느리 가와 생트오포튠 가(Rue Sainte-Opportune)의 교차 지점에 그곳이 앙리 4세의 암살 장소임을 알려주는 석판이 현재 존재한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된 [[사라예보 사건]] 때도 교통체증 상태를 이용한 암살이 행해졌다. 이렇게 비슷한 사례들이 빈번해지자, 오늘날에는 전 현직 국가원수가 움직일 때 일부러 신호등을 조작하며 미리 도로를 비워놓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래서 국왕의 마차가 가지 못하자 근위병들이 길을 트게 만든다고 국왕의 마차에서 떨어졌는데, 그때를 노렸던 라바이약이 국왕의 마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앙리 4세를 칼로 2번이나 찔러 죽였다. 앙리 4세의 [[유언]]은 >'''"으윽! 칼에 찔렸다!"''' 였다. 이때 마차에 같이 타고 있었던 몽바존 공작 허큘레가 암살을 저지하려고 라바이약에게 덤볐으나 실패했다. 라바이약은 허큘레도 죽이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근위병들에게 제압당하면서 허큘레까지 죽이는 것은 실패했다. 그렇게 허큘레는 치명상을 면했고 치료를 받아 살아남았다.[* 허큘레 공작은 앙리 4세의 최측근이고 충신인터라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앙리 4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본인이 지원하여 장례식을 주관했다.] 라바이약은 바로 근위병들에게 얻어맞고 체포되었다. 앙리 4세의 암살은 당시 프랑스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공범자를 알아내기 위해 체포된 라바이약한테 [[고문]]을 했지만[* 종교에 미쳐서 국왕을 살해하고 고위급 귀족도 죽이려 한 대역죄인이었다는 것도 극심한 고문을 당한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라바이약이 심문당할 때부터 자신의 범행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앙리 4세는 죽어 마땅하며 나는 죽는 게 안 무섭다."'''는 망언을 하며 도발을 한 것도 고문을 당한 이유가 되었다. 이에 앙리 4세의 신하들이 제대로 분노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라바이약의 몸은 고문 후 거열형에 처해질 때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끝까지 배후는 없고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으며, 결국 그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라바이약은 재판에서 극형을 선고받았고, 약 2주 후인 5월 27일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오늘날의 파리 시청 앞 광장으로서, 19세기까지 주요 사형 집행이 행해지던 곳이다. [[미셸 푸코]]의 저작인 《감시와 처벌》의 맨 처음에 나오는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에 대한 사형 집행 장면의 무대도 이 곳이다.] [[거열형]]에 처해졌다. 거열형으로 조각난 라바이약의 시신은 불태워져 파괴되었고 무덤도 만들어지지 못했다. 다만 서양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연좌제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가족들에게는 형사처벌이 없었다. 대신 라바이약의 부모는 프랑스에서 강제추방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은 '라바이약'이라는 성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프랑스 거주가 허락되었다. 앙리 4세는 죽은 후에 방부처리되어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때 혁명군들이 생 드니 대성당을 약탈하고 훼손하면서 역대 국왕, 왕비, 왕족들의 시신과 함께 앙리 4세의 시신도 훼손되었다. 훼손된 앙리 4세의 시신은 2개의 구덩이에 일단 파묻고 생석회로 막아 놓았는데, 왕정 복고 후 [[루이 18세]]가 이를 수습하고 복구했다. 더불어 이 약탈 때 시신의 머리는 잘려나가 민간에 넘겨졌는데, 200여년 동안 떠돌던 앙리 4세의 머리는 한참이 지난 2010년에 신원이 겨우 밝혀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